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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방(棒)을 운문(雲門)이 주었는데, 운문이 천삼백 년 후에 저 손자인디, 손자한테 말로 방 맞는 것도 지금 전부 전통해 나오거든’

  • 운문 선사의 방(棒).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의 내용.

[참고]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拈頌說話) 1』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칙 ‘주행(周行)’ p27. p40~41.

世尊初生下時 周行七步 目顧四方 一手指天 一手指地云 天上天下唯我獨尊[雲門偃拈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

세존께서 처음 탄생하실 때,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시며 한 손으론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론 땅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셨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운문 문언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때려 잡아서 주린 개나 주어 씹혔으면 세상을 태평케 하였겠다!]

圓通璣 上堂擧此話云 可謂欺視三界 傍若無人 最好是雲門 出來道 至天下大平 然 此二古聖 於建化門中 善則善矣 美則美矣 若於本分事中 檢點將來 猶欠一着在 敢問大衆 作麽生是本分事 良久云 鴛鴦繡出從敎看 莫把金針度與人

원통기(圓通璣)가 상당하여 이야기를 들어 말하였다. “가히 삼계(三界)를 속이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짓이구나. 가장 좋은 것은 운문(雲門)이 나와서 말하기를 ‘천하의 태평이나 도모했을 것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성인이 건화문(建化門)에서 볼 때엔 좋기는 좋고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만약 본분(本分)에서 장래를 점검해 보면 그래도 하나가 모자란다. 삼가 대중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본분의 일이라 하는가?”
그리고는 양구했다가 말하였다. “원앙새 수(繡)놓은 것은 보여주거니와 금침(金針)은 그대에게 건네줄 수가 없다”

운문 선사의 방(棒)

  •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의 내용을 말함. 『선문염송(禪門拈頌)』 제2칙 '주행(周行)‘ 참고.

[참고]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

석가여래께서 출생하면서 바로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가장 높다(天上天下唯我獨尊)」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여러 조사 스님들이 해석도 하고 칭송도 한 바가 많지마는, 운문 문언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때려 잡아서 주린 개나 주어 씹혔으면 세상을 태평케 하였겠다!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선지식들은 『아! 운문이야말로 참으로 「유아독존」의 뜻을 잘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답다』하고 모두 칭찬하였다.

‘삼백 년 후에’ (전강 스님 음성)

  • (수정) ‘천삼백 년 후에’

활연대오(豁然大悟)

  • 환하게 막힘이 없이 탁 트인 큰 깨달음.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활연(豁然 열리다·달達하다·탁 트인 골짜기 활/그러할 연)

  • ① 앞이 탁 트여[豁] 시원스러운 그러한[然] 모양.
  • ② 의문이 갑자기 풀려 막힘이 없이 밝게 깨달음.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격외(格外 격식 격/바깥 외)

  • 규정되고 고체화된 세간적(世間的)인 척도를 초월하는 것. 즉 분별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 격(格)은 격식(格式) · 규격(規格) · 법칙 · 규정 등을 말하지만 넓은 뜻으로는 세간(世間)의 척도라는 뜻이다.

[참고] 『벽암록(碧巖錄)』 (원오극근) 제9칙 ‘조주사문(趙州四門)’ 평창(評唱) 참고.

大凡參禪問道 明究自己 切忌揀擇言句 何故 不見趙州擧道 「至道無難唯嫌揀擇」

무릇 참선하며 도를 묻는 것은 자기를 밝히고자 함이니, 절대로 언구로 간택해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인가? 조주 스님이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으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라고 한 말을 듣지 못했는가?

又不見雲門道 「如今禪和子 三箇五箇聚頭 口喃喃地便道 『這箇是上才語句 那箇是就身處打出語』 不知古人方便門中 爲初機後學未明心地 未見本性 不得已而立箇方便語句 如祖師西來 單傳心印 直指人心 見性成佛 那裏如此葛藤 須是斬斷語言 格外見諦 透脫得去 可謂如龍得水 似虎靠山」

또한 듣지 못했는가? 운문 스님이 말하기를 “요즈음 선수행자들은 네댓 명이 머리를 맞대고 입을 떠벌리면서 ‘이것은 재능이 뛰어난 자가 한 말이며 저것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고들 한다. 이는 고인이 방편문에서, 처음 배우는 후학들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므로 부득이 방편으로 언구를 사용하게 되었음을 모른 것이라 하겠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셔서, 심인(心印)을 전하여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直指人心]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셨는데[見性成佛], 어느 곳에 이와 같은 언어문자가 있었겠는가? 모름지기 언어를 끊어 버리고 격외(格外)에서 참다운 이치[諦]를 보아 투철하게 벗어나야 용이 물을 얻은 것 같고 범이 산을 의지한 것과 같다”

“꿀 딱! 먹을 때 어떻게 살아가겄느냐?” “달다!” 어째요? 응, 어쩌냔 말이여?

  • ‘달다’라는 말은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의 공안에 대한 전강 스님의 답.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20~22.

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

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에 대오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