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古人)
- ① 불보살(佛菩薩)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 ② 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고인(古人)의 법문에―고인, 옛 고인 스님, 큰스님의 법문에 ‘거년(去年) 가난은 비(非)가난이다. 지나간 거년 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 무입추지(無立錐地)니라. 송곳 꽂을 땅이 없었느니라. 금년 가난은 시(是) 가난이여. 금년 가난은 참 가난이다. 추야무(錐也無)로구나. 송곳까장 없구나’ 허니, 점검을 허되 ‘여래선(如來禪)밖에는 안 된다’ 그랬으니, ‘여래선밖에는 안 된다’ 했으니 수좌는 거기에 어떻게 일러사 조사선(祖師禪)을 이르겄느냐?” 이놈을 묻는다 그 말이여
[참고] 『위앙록(潙仰錄)』 (선림고경총서13 | 장경각) p53~56.
師 一日問香嚴 我聞 汝在百丈先師處 問一答十 問十答百 此是汝聰明靈利 意解識想 生死根本 父母未生時 試道一句看 香嚴被問 直得茫然 歸寮將平日看過底文字 從頭要尋一句酬對 竟不能得 乃自嘆云 畵餠不可充饑
스님께서 하루는 향엄스님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백장스님의 처소에 살면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대답했다고 하던데 이는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이해력이 뛰어났기 때문일 줄 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생사의 근본이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 그대의 본래면목에 대해 한마디 말해 보아라"
향엄스님은 이 질문을 받고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방으로 되돌아와 평소에 보았던 모든 책을 뒤져가며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보았으나 끝내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림 속의 떡[畵餠]은 주린 배를 채워주지 못한다"屢乞師說破 師云 我若說似汝 汝已後罵我去 我說底是我底 終不干汝事 香嚴 遂將平昔所看文字燒却云 此生不學佛法也 且作箇長行粥飯僧 免役心神 乃辭師 直過南陽 覩忠國師遺跡 遂憩止焉
그런 뒤로 향엄스님은 여러 번 스님께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스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그대에게 말해준다면 그대는 뒷날 나를 욕할 것이네. 무엇이든 내가 설명하는 것은 내 일일 뿐 결코 그대의 수행과는 관계가 없느니라"
향엄스님은 이윽고 평소에 보았던 책들을 태워버리면서 말하였다. "금생에서는 더이상 불법을 배우지 않고 이제부터는 그저 멀리 떠돌아다니면서 얻어먹는 밥중노릇이나 하면서 이 몸뚱이나 좀 편하게 지내리라" 이리하여 눈물을 흘리며 스님을 하직하였다. 곧바로 남양(南陽) 지방을 지나다가 혜충국사(慧忠國師)의 탑을 참배하고는 마침내 그곳에서 쉬게 되었다.一日芟除草木 偶拋瓦礫 擊竹作聲 忽然省悟 遽歸 沐浴焚香 遙禮師云 和尙大慈 恩逾父母 當時若爲我說破 何有今日之事 乃有頌云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持 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處處無蹤跡 聲色外威儀 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
하루는 잡초와 나무를 베다가 우연히 기왓장 한 조각을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딱!"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향엄스님은 급히 거처로 돌아와 목욕 분향하고 멀리 계시는 스님(위산)께 절을 올리고는 말하였다. "스님의 큰 자비여! 부모의 은혜보다 더 크십니다. 만일 그때 저에게 말로 설명해 주셨더라면 어찌 오늘의 이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게송을 읊었다.
딱 소리에 알던 바를 잊으니 다시는 닦을 필요 없게 되었네. 덩실덩실 옛길을 넘나드니 초췌한 처지에 빠질 리 없어라. 곳곳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빛과 소리를 벗어난 몸짓이니, 제방의 도를 아는 이들은 모두가 상상기(上上機)라 하더라.
師聞得 謂仰山云 此子徹也 仰山云 此是心機意識 著述得成 待某甲親自勘過 仰山後見香嚴云 和尙讚歎師弟發明大事 爾試說看 香嚴擧前頌 仰山云 此是夙習記持而成 若有正悟 則更說看 香嚴又成頌云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貧猶有卓錐之地 今年貧錐也無 仰山云 如來禪 許師弟會 祖師禪 未夢見在
스님께서 들으시고는 앙산스님에게 "향엄이 확철대오했구나" 하시자, 앙산스님은 "이 게송은 알음알이로 따져서 쓴 것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볼 터이니 기다리십시오" 하였다.
앙산스님이 그 후 향엄스님을 보고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사제(師弟)가 깨달은 일을 칭찬하셨는데 그 일을 한 번 말해보게" 향엄스님이 일전에 읊었던 게송을 다시 들먹이자 앙산스님은 말하였다. "이는 지난번 일을 기억으로 말하는 것이네. 정말로 깨쳤다면 달리 설명해보게."
향엄스님이 또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금년의 가난이 진짜 가난이네. 작년의 가난은 바늘 꽂을 땅이라도 있더니 금년의 가난은 바늘마저 없구나"
앙산스님은 말하였다. "여래선(如來禪)은 사제가 알았다고 인정하겠네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서도 보지 못하고 있군"香嚴復有頌云 我有一機 瞬目視伊 若人不會 別喚沙彌 仰山乃報師云 且喜 閑師弟 會祖師禪也
향엄스님은 다시 게송을 지어 말하였다. "나에게 한 기틀 있어 눈 깜박하는 사이에 그것을 보네. 이 이치를 깨치지 못하는 자에게 더 이상 사미(沙彌)라 부르지 말지어다"
앙산스님은 이에 스님께 보고 드리고 말하였다. "반갑게도 지한(智閑) 사제가 조사선을 알았습니다”
여래선(如來禪)
- 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의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는 선.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서 이치나 일에 걸림이 없는 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조사선이 곧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송담스님 법문 No.685에서)
선지식(善知識)
- 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 ② 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학자(學者)
-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 ① 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 ② 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 ③ 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 ① 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 ② 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이―’ 허면 죽는다. 발써 찾으면 죽는다. ‘무슨 이치냐?’ 죽는다
- '찾다가 저 죽는다'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 멱즉지군불가견(覓卽知君不可見)’
[참고] 송담스님(No.111)—1979년 동지 법회(1979.12.22) (7분1초)
우리는 진묵겁(盡墨劫) 전에 이미 깨달음,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부처님과 조끔도 차별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도 원만구족(圓滿具足)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족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한 생각 딱 돌이키면—어디서 깨달음이 오는 것도 아니요, 누가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곳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원만구족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항시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너무나도 간결하고 송곳으로 찌르듯 하는 그러헌 법문을 해 주신 것입니다.다못 알 수 없는 꽉 맥힌 의심,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앉았거나 누웠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거나 괴롭거나 쓰리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아프다고 가려 내놓고, 바쁘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 시간은 가려 내놓고, 잠잘 때라고 가려 내놓고, 속상헌다고 가려 내놓고, 기쁘다고 가려 내놓고, 이리저리 다 가려 내놓으면 언제 공부를 해야 할 때냐?
중생은 단 한 생각 동안이라도 생각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생각 없는 편안하고 고요하고 그러헌 때를 찾어서 공부를 할려고 하면 일생 동안 공부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눈을 통해서는 보아야 하고, 귀를 통해서는 들어야 하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아야 하고, 숨쉬어야 하고, 입을 통해서 맛보고 말을 해야 하고, 손과 몸을 통해서는 따뜻하고 차웁고 딱딱하고 부드러운 거 그런 것을 다 감각을 해야 합니다. 잠시도 육근(六根)을 쉬고 일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끊임없이 자동적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은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활동하는 시간을 없이 하고 참선을 헐랴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그 사람이 생각하는 참선은 헐 기약이 없습니다.진여불성(眞如佛性)은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고 영특해서,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언제나 어디에나 두루하지 아니헌 곳이 없습니다.
그 표현이 바로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요.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육근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진여불성의 표현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눈으로 볼 수 없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 없고, 손을 통해서 잡을 수 없는 진여불성을 우리는 깨달라야 합니다.왜 눈으로 코로 귀로 육식(六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진여불성의 표현인데, 어째서 눈으로 볼랴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귀로 들을랴고 하면은 들리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을랴고 하면은 잡히지를 않는 것이냐? 우리는 목숨 바쳐서,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라도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고 법신불(法身佛) 아닌 것이 없건만, 왜 볼려고 허면 볼 수가 없고, 들을려고 허면 들을 수가 없느냐? 우리 모두에게 진묵겁 전부터서 원만구족해 있으면서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냐?육도법계(六道法界)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시기 때문에 육도(六道)를 여의고 적광토(寂光土)는 따로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뭣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요긴한 길은 오직 이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 불이 펄펄 타오르는 지옥으로 느껴졌던 것이, 한 생각 돌이킨 곳에 바로 그것이 천당이 되고, 극락이 되는 그 묘한 방법이 바로 참선법, 활구참선법 ‘이 무엇고?’ 뿐인 것입니다.(12분14초~19분14초)
불리당처상담연(不離當處常湛然) 멱즉지군불가견(覓卽知君不可見)
-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 영가(永嘉) 스님의 『증도가(證道歌)』 구절.
[참고]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국사 지눌) 「진심소재(眞心所在)」
或曰息妄心而眞心現矣라 하니 然則眞心體用이 今在何處오
曰眞心妙體가 遍一切處니 永嘉云 不離當處常湛然이나 覓卽知君不可見이라 하며 經云 虛空性故며 常不動故며 如來藏中에 無起滅故라 하시며 大法眼云 處處菩提路요 頭頭功德林이라 하시니 此卽是體所在也니라혹 말하길, “망심(妄心)을 쉬면 진심(眞心)이 나타난다니, 그렇다면 진심의 체(體)와 용(用)이 이제 어느 곳에 있습니까?”
답하길, “진심묘체(眞心妙體)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다. 영가(永嘉) 스님이 이르시길, ‘당처(當處)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고요[湛然]하나, 찾은 즉은 알거라 그대가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경에 이르시길, ‘허공의 성품인 연고며, 항상 동(動)하지 아니한 연고며, 여래장(如來藏) 중에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연고라’ 하며, 대법안[大法眼文益] 스님이 이르시길, ‘처처가 정각[菩提]의 길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공덕의 총림이라’ 하시니, 이것이 곧 이 마음의 체(體)가 있는 곳이니라.眞心妙用은 隨感隨現홈이 如谷應聲이니라 法燈云 今古에 應無墜하야 分明在目前이로다 片雲은 生晩谷하고 孤鶴은 下遙天이라 하니 所以로 魏府元華嚴云 佛法이 在日用處하며 在行住坐臥處하며 喫茶喫飯處하며 語言相問處하며 所作所爲하나 擧心動念하면 又却不是也라 하시니
참마음[眞心]의 미묘한 작용은 감(感)을 따라 나타남이 산골짜기 소리를 응(應)하여 메아리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법등태흠(法燈泰欽) 스님이 이르시길, ‘고금에 마땅히 떨어짐이 없어 분명히 목전(目前)에 있다. 조각구름은 날 저문 골짜기에서 나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려옴이라’ 하니, 그런 까닭으로 위부(魏府)의 원화엄(元華嚴) 장로가 이르시길, ‘불법(佛法)이 날마다 작용하는 곳[日用處]에 있고, 행주좌와하는 곳[行住坐臥處]에 있으며,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고, 말하고 서로 묻는 곳에 있으며, 짓고 행위를 하나 마음을 들어 생각을 동(動)하면 또 옳지 못하니라‘
故知하라 體則遍一切處하야 悉能起用이나 但因緣有無不定일새 故로 妙用不定耳이어니와 非無妙用也이니라 修心之人이 欲入無爲海하야 度諸生死인댄 莫迷眞心體用所在也어다.
그러므로 알라. 마음의 본체가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하여 다 능히 작용을 일으키나니, 다만 인연의 유무(有無)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용(妙用)도 또한 일정하지 않거니와 묘용이 없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 닦는 사람은 무위(無爲)의 바다에 들어가 모든 생사를 건너려고 한다면 진심(眞心)의 체(體)와 용(用)이 있는 곳을 미혹하지 말지어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