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
-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불교의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경(經)이나 모든 글이 소용없다 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였고, 계율이나 염불이나 송주(誦呪)를 죄다 부인하고 오직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들어 있다(觀心一法總攝諸行)」 하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대번에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되게 한다(直指人心見性成佛)」고 하였다.
- 실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성인이 나왔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다투어 묵은 불교를 버리고 이 새 법, 참선법(參禪法)을 배우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란 것은 달마조사가 전하여 온 특별한 법, 비밀한 이치 곧 「불법의 똑바른 이치(佛法的的大意)」란 말과 같은 말이다.
서천(西天)
- ① 서쪽 하늘.
- ② 서천 서역국(西天西域國 : 인도의 옛 이름).
확철대오(廓徹大悟 클 확/통할 철/큰 대/깨달을 오)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생사(生死)
- ① 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 ② 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❶] 송담스님(No.389)—1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참고 ❷]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상권. 동진(東晉) 평양(平陽) 사문(沙門) 석법현(釋法顯) 한역(漢譯). (동국역경원 | 최민자 번역)
爾時 世尊卽說偈言 我欲棄捐此 朽故之老身 今已捨於壽 住命留三月 所應化度者 皆悉已畢竟 是故我不久 當入般涅槃 我所說諸法 則是汝等師 頂戴加守護 修習勿廢忘 汝等勤精進 如我在無異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②]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지일자(知之一字)가 중화지문(衆禍之門)
- 「‘알 지(知)‘ 자 한 글자가 온갖 재앙의 문이다」
[참고 ①] 『대혜보각선사어록』 제16권 대혜보각선사보설(大慧普覺禪師普說) ‘부경간이 청한 보설(傅經幹請普說)‘ (대혜종고 1089~1163 | 김태완 옮김 | 소명출판) p230~234 참고.
那箇是生而之知者 如趙州作沙彌時 同本師行脚到南泉 値南泉臥次 本師禮拜了 趙州方禮拜 南泉問云 近離甚處 州云 近離瑞像 泉云 還見瑞像麽 州云 瑞像則不見 面前只見臥如來 南泉遂起 問 爾是有主沙彌 無主沙彌 州云 是有主沙彌 泉云 那個是爾主 若是如今禪和家 便近前彈指 打箇圓相 喝一喝拍一拍 拂袖便行 放出這般惡氣息 爾看他趙州 緩緩地近前道 孟春猶寒 伏惟和尙尊候萬福 泉乃喚維那云 此沙彌別處安排
어떤 것이 태어나면서 아는 경우인가? 예컨대, 조주 스님(778~897)이 사미였을 때에 본사(本師)와 함께 행각하여 남전(南泉)에 이르렀는데, 마침 남전 스님(748~834)이 누워 있었다. 본사가 절을 하고서 조주 스님이 막 절을 하려고 하는데 남전 스님이 물었다.
‘최근 어디를 떠나왔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瑞像)을 떠나왔습니다’남전 스님이 물었다. ‘서상을 보았는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서상은 보지 못했지만, 눈앞에서 다만 누워 있는 여래를 봅니다’남전 스님이 이에 일어나 물었다. ‘그대는 스승이 있는 사미인가? 스승이 없는 사미인가?’
조주 스님이 말했다. ‘스승이 있는 사미입니다’남전 스님이 말했다. ‘누가 그대의 스승인가?’
만약 요즈음의 선객이라면, 곧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퉁기거나, 한 개 원상(圓相)을 그리거나, 한 번 고함을 지르거나, 박수를 한 번 치거나, 소매를 털고서 곧장 가거나 하는 등등의 더러운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저 조주 스님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초봄이니 아직 춥습니다. 스님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삼가 빕니다’남전이 이에 유나(維那)를 불러 말했다. ‘이 사미를 특별히 대접하여라’
次日却來問 如何是道 南泉也不行棒 也不下喝 也不談玄 也不說妙 也不牽經 也不引論 也不擧古人公案 亦不說事 亦不說理 只實頭向他道 平常心是道 爲他趙州已理會得平常心了 便却問 還假趣向也無 泉云 擬向卽乖 州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 不屬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疑之道 猶如太虛廓然蕩豁 豈可於中彊是非耶 趙州於言下千了百當
다음날 다시 와서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남전 스님은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않고, 고함을 지르지도 않고, 현묘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경론을 인용하지도 않고, 옛사람의 공안(公案)을 말하지도 않고, 사실을 말하지도 않고, 이치를 말하지도 않고, 다만 확실하게 그에게 말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조주 스님은 이미 평상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시 물었다. ‘향하여 다가갈 수 있습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려 하면 어긋난다’조주 스님이 말했다. ‘향하여 다가가지 않으면 어떻게 도를 압니까?’
남전 스님이 말했다. ‘도는 앎[知]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不知]에 속하지도 않는다. 앎은 허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알지 못함은 깜깜한 무기(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의심없이 도에 통달하면, 마치 커다란 허공과 같아서 막힘없이 텅 비었는데, 어떻게 그 속에서 억지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있겠느냐?’조주 스님은 그 말을 듣고서 밝게 깨달았다.
南泉道 道不屬知 不屬不知 圭峰謂之靈知 荷澤謂之 知之一字衆妙之門 黃龍死心云 知之一字衆禍之門 要見圭峰 荷澤則易 要見死心則難 到這裏須是具超方眼 說似人不得 傳與人不得 所以圜悟先師說 趙州禪只在口脣皮上 難奈他何 如善用兵者 不齎糧行 就爾水草糧食 又殺了爾
남전 스님은 ‘도는 앎에 속하지도 않고, 알지 못함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만, 규봉 스님(780~841)은 그것을 일러 ‘신령스런 앎[영지(靈知)]’이라 하였고, 하택 스님(684~758)은 그것을 일러 ‘지(知) 한 글자는 온갖 묘함의 문(門)이다’라 하였고, 황룡사심(1043~1114) 스님은 말하기를 ‘지(知) 한 글자는 온갖 재앙의 문(門)이다’라 하였으니, 규봉과 하택을 알기는 쉬우나 사심(死心)을 알기는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선 모름지기 테두리와 격식을 벗어난 안목을 갖추어야 하니,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남에게 전해 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원오 선사(先師 1063~1135)께서는 말씀하시길 ‘조주의 선(禪)은 다만 입술 위에 있으니, 그것을 어떻게 하기는 어렵다(다른 번역 : 조주의 선이 그저 말로 되는 것이라면 무에 어려울 게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마치 용병(用兵)을 잘하는 자가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그대의 수초(水草)를 양식으로 삼아 그대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참고 ②] 『고봉화상 선요 어록』 (고봉 1238~1295 |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시중(示衆 其十四)’ p110~112 참고.
若論參禪之要 不可執蒲團爲工夫 墮於昏沈散亂中 落在輕安寂靜裏 總皆不覺不知 非唯虛喪光陰 難消施主供養 一朝眼光落地之時 畢竟將何所靠
만약 참선의 요점을 논하자면 방석에 앉는 것을 집착하여 공부를 삼아 혼침과 산란 가운데 떨어지거나, 편안하고 고요한 속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 모두 다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리니 오직 세월을 허송할 뿐 아니라 시주들의 공양을 소화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루 아침에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 필경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山僧昔年在衆 除二時粥飯 不曾上蒲團 只是從朝至暮 東行西行 步步不離 心心無間 如是經及三載 曾無一念懈怠心 一日驀然踏著自家底 元來寸步不曾移
산승이 옛날 대중에 있을 때 죽과 밥 먹는 두 때를 제외하고 방석 위에 올라앉지 않고 다만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걸음걸음에 여의지 않고 마음 마음이 간격이 없었다. 이와같이 3년을 지내도록 일찌기 한 생각도 게으른 마음이 없다가 하루는 문득 나의 고향[自家]을 밟고 나니 원래 한 걸음도 옮긴 것이 아니었더라.
昏沈掉擧 喜怒哀樂 卽是眞如佛性 智慧解脫 只緣不遇斯人 醍醐上味 飜成毒藥 靈利漢 假饒直下知非 全身擔荷 正好朝打三千 暮打八百 何故 豈不見道 知之一字 衆禍之門
혼침과 도거, 희로애락이 그대로 진여불성이고 지혜해탈이건만 다만 인연이 이러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제호상미가 도리어 독약이 되었다. 영리한 사람이 가령 당장에 그른 줄 알아 온 몸으로 짊어지더라도 바로 아침에 삼천 번을 때리고 저녁에 팔백 번을 때릴 것이니 무엇 때문인가? 어찌 '지(知)라는 한 글자가 모든 재앙의 문이다'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가?
若論此事 如蚊子上鐵牛相似 更不問如何若何 便向下觜不得處 拌命一鑽 和身透入 正恁麼時 如處百千萬億香水海中 取之無盡 用之無竭 設使志不堅心不一 悠悠漾漾 東飛西飛 饒你飛到非想非非想天 依舊只是箇餓蚊子
만약 이 일을 논하자면, 모기가 쇠로 된 소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다시 이러쿵 저러쿵 묻지 않고 당장에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서 목숨을 버리고 한 번 뚫어서 몸으로까지 뚫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이런 때 마치 백천만억 향수해(香水海)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취(取)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고갈됨이 없지만, 설사 뜻이 견고하지 않고 마음이 한결같지 않아 아득히 출렁대며 동으로 날고 서로 날다가 설사 네가 날아서 비비상천에 이른다하더라도 여전히 다만 한 마리 굶주린 모기일 뿐이더라.
[참고 ③] 『선가귀감(禪家龜鑑)』 (청허휴정 1520~1604 / 1564년에 지은 책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刊) p220~221. (가로판 p226~227)
神光이 不昧하야 萬古徽猷로다 入此門來에 莫存知解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밝고나。이 문 안에 들어오매 알음알이를 두지 말지어다.
(註解) 神光不昧者는 結上昭昭靈靈也요 萬古徽猷者는 結上本不生滅也요 莫存知解者는 結上不可守名生解也라 門者는 有凡聖出入義하니 如荷澤의 所謂知之一字가 衆妙之門也라
(주해) 거룩한 빛이 어둡지 않다는 것은 첫 머리의 「밝고 신령하다」는 것을 맺는 말이요, 만고에 밝다 함은 「본래부터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맺는 말이며,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하는 것은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하는 것을 맺는 말이다。「문(門)」이란 범부와 성인이 드나든다는 뜻이 있으니, 마치 하택신회 선사가 이른바 ‘알 지(知)’자 한 자가 온갖 묘한 이치의 문이라고 한 것과 같다.
吁라 起於名狀不得하야 結於莫存知解하니 一篇葛藤을 一句都破也로다 然이나 始終一解요 中擧萬行하니 如世典之三義也라 知解二字는 佛法之大害故로 特擧而終之하니 荷澤神會禪師가 不得爲曹溪嫡子者는 以此也라
아! 「이름 지을 수도 모양 그릴 수도 없다」는 데서 시작하여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것으로 끝을 맺으니, 이 한 권에 얽힌 넌출을 한마디 말로 모두 끊어 버렸다。그리하여 처음과 끝을 일해(一解)로써 말하고, 중간에는 온갖 행동을 들어 보였으니, 마치 유교 경전의 삼의와 같다。지해(知解) 두 글자는 불법에 큰 해독이 되므로 특별히 들어서 끝을 마치니 하택신회 선사가 조계의 적자가 못 됨은 이 때문이다.
참선(參禪)
- ① 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 ② 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