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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집

  • 부엉이는 집(둥지)에 먹을 것을 많이 모아 두는 버릇이 있다는 데서, 없는 것이 없이 무엇이나 다 갖추어져 있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거천하다

  • (사투리) 아랫사람이나 동물 따위를 데리고 살다.

천둥이(賤둥이)

  • ① ‘천더기(賤-- : 업신여김과 푸대접을 받는 사람)’의 사투리.
  • ② ’천한 둥이’의 준말. 조실부모한 고아나 남의 손에 길러진 아이를 일컫는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평상화(平常話)

  • ① 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 ② 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 (4분 58초)

[평상화]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
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제일구(第一句)

  • ① ‘처음 한마디 말’이니 불교의 핵심도리를 드러내는 첫번째 말.
  • ②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개념 지을 수 없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以心傳心) 진리를 가리키는 말.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206~207. (가로판 p212. p217)

[ 別明臨濟宗旨 ] 大凡一句中에 具三玄하고 一玄中에 具三要하니 一句는 無文綵印이요 三玄三要는 有文綵印이라 權實은 玄이요 照用은 要라.

따로 임제종지를 밝힘 : 일구(一句) 가운데 삼현(三玄)이 갖추어 있고, 일현(一玄) 가운데 삼요(三要)가 갖추어 있는데, 일구는 글발이 없는 인(印)이고, 삼현과 삼요는 글발이 있는 인이다。 권도와 실상은 현(玄)이며, 비침과 씀은 요(要)가 된다.

역주(譯註) 무문채인(無文綵印) 또는 무문인(無文印) : 선법(禪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는 수가 있다.
① 의리선(義理禪)이란 것은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을 이름이니, 마치 인장으로써 진흙에 찍으면(印泥) 인발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 같다.
② 여래선(如來禪)이란 것은 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 자취가 있고 이치의 길이 남아 있어서, 마치 인장을 물에 찍은(印水) 것 같다.
③ 조사선(祖師禪)이란 것은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이치나 일에 다 걸림 없는 것이 마치 인장을 허공에 찍은(印空) 것과 같은 것이다.

[참고 ❷]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207. (가로판 p212)

[ 三句 ] 第一句는 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糞箕掃箒라.

삼구 : 첫째 구는 몸 죽고 목숨 잃는 것이요, 둘째 구는 입을 열기 전에 그르쳤고, 세째 구는 똥삼태기와 비이니라.

[참고 ❸] 『임제록 · 법안록』 (선림고경총서12, 장경각) ‘시중’ p38.

師又云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麼生會 下座

스님은 또 말씀하셨다. “한 구절[一句]에는 반드시 3현(三玄)의 문이 갖춰져 있고, 한 현[一玄]의 문에는 반드시 3요(三要)가 갖추어 있어서 방편[權]도 있고 활용[用]도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참고 ❹] 『임제록 · 법안록』 (선림고경총서12, 장경각) ‘시중’ p87. 『자유인 임제』 (성열 지음, 현암사) p475. p390.

問如何是眞佛眞法眞道 乞垂開示 師云 佛者心淸淨是 法者心光明是 道者處處無碍淨光是 三卽一皆是空名 而無實有 如眞正學道人 念念心不間斷

문(問), “어떤 것이 진불(眞佛)이며, 진법(眞法)이며, 진도(眞道)인지 스님의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임제 스님이 말했다. “부처[佛]는 마음이 청정한 것[心淸淨]이 그것이고, 법(法)은 마음이 밝게 빛남[心光明]이 그것이고, 도(道)란 곳곳에 걸림없이 청정하게 빛남[處處無碍淨光]이 그것이다. 그런데 셋이 곧 하나이니 이것도 모두 빈 이름 뿐이고, 실(實)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학도인은 잠간도 마음이 간단(間斷)하지 않다.

自達磨大師從西土來 祇是覓箇不受人惑底人 後遇二祖 一言便了 如知從前虛用功夫 山僧今日見處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오신 이후 오직 남의 유혹을 받지 않을 사람을 찾았다. 뒤에 이조(二祖)를 만났는데, 한마디에 깨닫고 이전에 하던 공부가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오늘 산승의 견처(見處)도 불조(佛祖)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참고 ❺] 『西山大師의 禪家龜鑑硏究』 (신 법인著, 김영사) p360~361

第一句 喪身失命 第二句 未開口錯 第三句 糞箕掃箒.
즉 第一句는 身命을 喪失하고, 第二句는 입도 열기 전에 틀리며, 第三句는 便을 치우는(糞掃) 箕掃라는 것이다.

앞에서 본 바에 의하면 臨濟는 ‘如何是第一句오’라는 學僧의 물음에,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이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그의 어록에,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第一句중에서 얻게 된다면 祖師와 佛陀와 더불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선가귀감)는 第一句에 ‘喪身失命’이라고 하여 있다.

第二句는 ‘未開口錯’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風穴昭禪師의 說이다. ‘人天眼目‘에는 ‘如何是第二句’下에 師云이라 하여 臨濟의 第二句語가 있고, 다음에 風穴云의 ‘未開口前錯’(『인천안목』 권1 三句)이 있다.(問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穴云, 未開口前錯)

第三句下의 ‘糞箕掃箒’는 雲峯悅禪師의 說이다. 이 역시 ‘如何是第三句’ 밑에 師云이라 하여 臨濟의 第三句語가 있고, 그 다음에 風穴과 道吾의 言及이 있고 이어서 ‘峯云 糞箕掃箒’(『인천안목』 권1 三句)라고 있다.(問如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穴云, 明破則不堪. 吾云, 頭上一堆塵. 脚下三尺土. 印云, 西天此土. 峯云, 糞箕掃箒)

[참고 ❻]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 刊) p207, p212. (가로판 p213, p218)

[ 三玄 ]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역주(譯註)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참고 ❼] 전강선사(No.026)—전강선사 일대기 제13호(경술1970년 12월 22일 새벽.음) (1971년 1월 18일 새벽) (1분57초)

[현중현]

체중현(體中玄)은 고대로—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로, 본래무일물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비유비무(非有非無)로 체중현이라고 헌다든지, 석가(釋迦)도 유미회(猶未會)로 체중현이라 헌다든지, 모도 그러헌 그 법견(法見)을 가지고 체중현이라 햐. 왜 향상(向上)도 그 체중현일 것이고 뭐 그렇지 그 뭐여?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도 그 체중현 밖에 더 되아?

귀로 들을 수 있고, 뜻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헐 수 있고. 고러헌 것 가지고는, 체중현 가지고는...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경(經)부텀 들으면 아는 것이여. 들어가지고 아는 것이 체중현(體中玄)이여. 체중현 도리, 그거 가지고 뭘 혀? 그 자구(自救)도 불요(不了)여. 제 목숨 소용... 자구불요(自救不了)여. 제 목숨 구허지 못혀. 체중현이라는 건 자기를, 저를 구허지 못헌 것이고.

구중현(句中玄)이여. 구중현이라는 것은 처컥 들으면 벌써 그만 그 체중현 해(解)는 벗거져. '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는디, 한 물건도 없는 그 가운데에 역무일물(亦無一物)이, 또한 일물지해(一物之解)도 없다' 요렇게 해서 고 지견(知見)까장 벗거질 수가 있지마는, 고것도 인천위사(人天爲師)는 되아. 인천의 스승은 된다 했어.

그러나 이 현중현(玄中玄)은 불조위사(佛祖爲師)가 되어야지.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어야 할 거 아닌가? 척, 그 현중현이라는 것은 용무생사(用無生死)다. 인자 생사 없는 것을 막 쓴다 그 말이여.(32분56초~34분55초)

[참고 ❽] 『만공법어(滿空法語)』 (修德寺 能仁禪院) 「법훈(法訓)」 '나를 찾는 법—참선법(參禪法)' p262. p264~265.

공부의 과정(課程)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 •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 • 사무애(事無碍)하게 되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나니라.

-지무생사(知無生死) ; 생사 없음을 아는 것.
-계무생사(契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에 계합하는 것.
-체무생사(體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체달함.
-용무생사(用無生死) ; 생사 없는 경지를 내 마음대로 수용(需用)하는 것.
-이무애(理無碍) ; 이치(理致)에 걸림이 없는 지무생사(知無生死) • 계무생사(契無生死)의 경지(境地).
-사무애(事無碍) ; 사물(事物)에 걸림이 없는 체무생사(體無生死) •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

[참고 ❾]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 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산스크리트어)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고액(苦厄 쓸·괴로울 고/재앙·불행한 일 액)

  • 괴롭고 힘든 일과 재앙으로 말미암은 불운.

드리

  • ‘마구(아주 세차게, 매우 심하게, 앞뒤를 따지지 않고 아무렇게나 함부로)’의 옛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