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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영아(嬰兒 어린아이·갓난아이 영/아이·아기·젖먹이·나이가 어린 사람 아)

  • 젖먹이.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공적영지(空寂靈知)

  • 혜능(慧能, 638-713)의 제자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를 개조(開祖)로 하는 하택종(荷澤宗)의 근본 사상으로 마음의 본질을 ‘공적(空寂)하면서 동시에 신령스럽게 아는’—공적(空寂)한 영지(靈知)의 뜻으로 파악한 것.

[참고 ❶] 『도서(都序) · 절요(節要)』 (규봉종밀 술 | 김탄허 현토역해 | 교림) p70~72.

云諸法如夢을 諸聖이 同說하시니 故로 妄念이 本寂하고 塵境이 本空이라 空寂之心이 靈知不昧하나니 卽此空寂之知 是汝眞性이라.

이르되 모든 법(法)이 꿈과 같음을 모든 성인(聖人)이 한가지 설하시니, 고(故)로 망념(妄念)이 본래(本來) 고요하고 진경(塵境)이 본래(本來) 공(空)한지라 공적(空寂)한 마음이 신령(神靈)히 알아 매(昧)하지 않나니, 곧 이 공적(空寂)의 지(知)가 이 너의 진성(眞性)이라.

任迷任悟하야 心本自知하야 不藉緣生이며 不因境起라 知之一字 衆妙之門이언마는 由無始迷之故로 妄執身心爲我하야 起貪嗔等念하나니,

미(迷)함에 맡기고 깨달음에 맡겨 마음이 본래(本來) 스스로 알아서 연(緣)을 가자(假藉)해 나지 않으며, 경계(境界)를 인(因)하여 일어나지 않는지라 지(知)의 한 글자가 뭇 묘(妙)한 문(門)이언마는 무시(無始)에 미(迷)함을 말미암은 고(故)로 망령되이 몸과 마음을 집(執)하여 아(我)를 삼아서 탐진(貪嗔) 등 생각을 일으키나니,

若得善友의 開示하야 頓悟空寂之知하면 知且無念無形이어니 誰爲我相人相이리오 覺諸相空하면 心自無念이라 念起卽覺하라 覺之卽無니 修行妙門이 唯在此也니라.

만일 선우(善友)의 개시(開示)함을 얻어서 몰록 공적(空寂)의 지(知)를 깨달으면 지(知)는 또 생각이 없고 형(形)이 없거니 무엇이 아상(我相) 인상(人相)이 되리오. 모든 상(相) 공(空)함을 깨달으면 마음이 스스로 생각이 없는지라 생각이 일어나면 곧 각(覺)하라. 각(覺)하면 곧 없음이니, 수행(修行)하는 묘문(妙門)이 오직 이에 있느니라.

[참고 ❷]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 1卷. 卍新纂大日本續藏經 第63冊. (唐 裴休問 宗密答)

荷澤 又收束無爲無住 乃至不可說等種種之言 但云空寂知 一切攝盡 空者 空却諸相 猶是遮遣之言 唯寂是實性不變動義 不同空無也 知是當體表顯義 不同分別也 唯此方爲眞心本體故 始自發心 乃至成佛 唯寂唯知 不變不斷

하택은 또한 무위(無爲) · 무주(無住) 내지 불가설(不可說) 등 여러 종류의 말을 하나로 묶어 다만 공적(영)지(空寂知)라고 하고, 일체를 그 속에 통일시켰다. 공(空)이란 제상(諸相)을 제거하는 것이니 차견(遮遣 : 부정적 방법으로 뜻을 드러냄)의 말이다. 적(寂)이란 실상의 본성이 변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전혀 없다[空無]’는 뜻과 다르다. (영)지(知)란 마음의 당체(當體)를 표현(表顯 : 긍정적 방법으로 뜻을 드러냄)하는 뜻으로 분별(分別)과 같지 않다. 이들 뜻을 갖추어야 비로소 진심(眞心)의 본체(本體)가 된다. 그러므로 처음 공부할 때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적(寂)과 지(知)만이 있을 뿐이니 변하지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다.

[참고 ❸] 『보조어록(普照語錄) - 정혜결사문 · 수심결』 (보조국사 지눌 지음 | 대성 · 강건기 옮김 | 무각사) p170~173. p176~179. p188~191.

〇問 上上之人 聞卽易會 中下之人 不無疑惑 更說方便 令迷者趣入

묻는다. 근기(根機)가 아주 높은 사람은 들어서 쉽게 알겠지만 그렇지 못한 중하근기(中下根機)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다. 다시 방편(方便)을 설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 알아듣게 해 달라.

答 道不屬知不知 汝除却將迷待悟之心 聽我言說 諸法如夢 亦如幻化 故妄念本寂 塵境本空 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卽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亦是三世諸佛 歷代祖師 天下善知識 密密相轉底法印也

답한다. 도(道)는 알고 모르는 데 속하지 않는다. 그대는 깨치기를 기다리는 미혹한 생각을 버리고 내 말을 들어 보라. 모든 법(法)은 꿈과 같고 환(幻)과 같다. 그러므로 망령된 생각은 본래 고요[寂]하고 객관 대상[塵境]은 본래 공(空)하다.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한 그곳에서 신령스러운 앎[靈知]은 어둡지 않다. 바로 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祖師), 천하의 선지식(善知識)들이 서로 은밀히 전해 온 법인(法印)이다.

若悟此心 眞所謂不踐階梯 徑登佛地 步步超三界 歸家頓絶疑 便與人天爲師 悲智相資 具足二利 堪受人天供養 日消萬兩黃金 汝若如是 眞大丈夫 一生能事已畢矣

만약 이 마음을 깨치면, 이것이 참으로 단계를 밟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에 삼계(三界)를 초월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단박에 의심을 끊으며, 이내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인간과 천상에 공양을 받을 만하고, 하루에 능히 만 냥의 황금을 소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대가 만일 이와 같으면 참다운 대장부(大丈夫)이니, 한평생에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問 據吾分上 何者是空寂靈知之心耶

묻는다. 나의 분상(分上)으로 본다면 어떤 것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인가?

答 汝今問我者 是汝空寂靈知之心 何不返照 猶爲外覓 我今據汝分上 直指本心 令汝便悟 汝須淨心 聽我言說 從朝至暮 十二時中 或見或聞 或笑或語 或瞋或喜 或是或非 種種施爲運轉 且道 畢竟是誰能伊麽運轉施爲耶

답한다.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는 바로 그것이 그대의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다. 어째서 돌이켜 비추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내가 이제 그대의 분상(分上)에 의거해서 본마음[本心]을 바로 가리켜 깨치도록 하겠으니,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말을 잘 들어 보라. 그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며, 옳다 그르다 하는 갖가지로 행위하고 움직이는데, 필경 누가 이렇게 움직이고 행위할 수 있는지 말해 보라.

若言色身運轉 何故有人 一念命終 都未壞爛 卽眼不自見 耳不能聞 鼻不辨香 舌不談論 身不動搖 手不執捉 足不運奔耶 是知 能見聞動作 必是汝本心 不是汝色身也 況此色身 四大性空 如鏡中像 亦如水月 豈能了了常知 明明不昧 感而遂通恒沙妙用也 故云 神通幷妙用 運水及搬柴

만약 색신이 움직인다면, 어째서 어떤 사람이 일순간 목숨이 끊어지면 몸이 다 무너지지도 않았는데도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고,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며, 혀는 말을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내달리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보고 듣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본래 마음이지 색신(色身)이 아님을 알 것이다.
하물며 이 색신을 만든 사대(四大)의 성품은 비어 있어 거울 가운데 비친 영상과 같고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은데, 어떻게 그것이 항상 뚜렷이 알며[了了常知] 밝고 밝아 어둡지 않으면서[明明不昧], 감응하면 마침내 무수한 묘용(妙用)에 통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신통(神通)과 묘용(妙用)은 물을 긷고 나무를 나르는 것이다(『경덕전등록』 권8, 방거사龐居士의 말)”라고 한 것이다.(p170~173)

〇然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不同無情 性自神解 此是汝空寂靈知 淸淨心體 而此淸淨空寂之心 是三世諸佛勝淨明心 亦是衆生本源覺性

그러나 모든 법(法)이 비고 고요한 곳에서도 영지(靈知)는 어둡지 않으니, 생명 없는 것[無情]들과는 달라서 성품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안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空寂)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 이 청정하고 공적한 마음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수승하고 깨끗한 밝은 마음[勝淨明心]이며, 또한 중생의 본래 근원인 깨친 성품[本源覺性]이다.

悟此而守之者 坐一如而不動解脫 迷此而背之者 往六趣而長劫輪廻 故云 迷一心而往六趣者 去也動也 悟法界而復一心者 來也靜也

이 마음을 깨달아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꼼짝 않고 앉은 채로 해탈할 것이며, 이것을 모르고 등지는 사람은 육취(六趣)에 떨어져 오랜 겁(劫)을 윤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마음에 미혹하여 육도에 떨어지는 사람은 가는 것이요 흔들리는 것이며, 법계(法界)를 깨달아 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오는 것이요 조용한 것이다(청량징관淸凉澄觀의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권1)”라고 하였다.

雖迷悟之有殊 乃本源則一也 所以云 所言法者 謂衆生心 而此空寂之心 在聖而不增 在凡而不減 故在聖智而不耀 隱凡心而不昧 旣不增於聖 不少於凡 佛祖奚以異於人 而所以異於人者 能自護心念耳

비록 미혹하고 깨친 것이 다르지만 근본에서는 하나이다. 그래서 “법(法)이란 중생의 마음이다(『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입의분立義分」)”라고 하였다. 이 공적(空寂)한 마음은 성인(聖人)이라고 해서 늘지 않고, 범부(凡夫)라고 해서 줄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 속에 있어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 있어도 어둡지 않다. 이미 성인에게서 더하지 않고 범부에게서 덜하지 않는다면, 부처와 조사가 어찌 보통 사람과 다르겠는가.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능히 스스로 마음을 보호하는 것뿐이다.(p176~179)

〇問 後修門中 定慧等持之義 實未明了 更爲宣說 委示開迷 引入解脫之門

묻는다. 깨친 후에 닦는 문[後修門]에서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等] 가지는[持] 뜻을 아직 확실히 모르겠다. 다시 자세히 설명하여 미혹을 없애고 해탈의 문(門)에 들게 해 달라.

答 若設法義 入理千門 莫非定慧 取其綱要 則自性上 體用二義 前所謂空寂靈知 是也 定是體 慧是用也 卽體之用故 慧不離定 卽用之體故 定不離慧 定則慧故 寂而常知 慧則定故 知而常寂

답한다. 만약 법(法)과 그뜻을 말한다면,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門)이 모두 정(定)과 혜(慧) 아님이 없다. 그 요점을 들면 자기 성품의 본체[體]와 작용[用]의 두 가지 뜻에 불과하니, 앞에서 말한 빈 고요함[空寂]과 신령스러운 앎[靈知]이 그것이다.
정(定)은 본체이고 혜(慧)는 작용이다. 본체에 즉(卽)한 작용[卽體之用]이므로 혜(慧)는 정(定)을 떠나지 않고, 작용에 즉(卽)한 본체[卽用之體]이므로 정(定)은 혜(慧)를 떠나지 않는다. 정(定)이 곧 혜(慧)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寂而常知], 혜(慧)가 곧 정(定)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知而常寂].

如曹溪云 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癡自性慧 若悟如是 任運寂知 遮照無二 則是爲頓門箇者 雙修定慧也

조계(曹溪) 스님이 “마음자리에 어지러움 없음이 자성(自性)의 정(定)이요, 마음자리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의 혜(慧)이다(『육조단경』 「돈점품」)”라고 한 말씀과 같다. 이와 같이 깨달아서 고요함[寂]과 앎[知]이 자유자재하고, 막음[遮]과 비춤[照]이 둘이 아니면, 이것이 바로 돈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것이다.

若言先以寂寂 治於緣慮 後以惺惺 治於昏住 先後對治 均調昏亂 以入於靜者 是爲漸門劣機所行也 雖云惺寂等持 未免取靜爲行 則豈爲了事人 不離本寂本知 任運雙修者也 故曹溪云 自悟修行 不在於諍 若諍先後 卽是迷人

만약 먼저 고요함[寂寂]으로써 망념[緣慮]을 다스리고 그 다음에 또렷함[惺惺]으로써 혼침[昏住]을 다스려, 선후로 대치(對治)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르게 다스리며 고요함[靜]에 들어간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가 하는 행이다. 이는 비록 또렷함[惺]과 고요함[寂]을 고르게[等] 가진다[持]고 하지만 고요함[靜]을 취해 수행으로 삼는 것을 면치 못하니, 어찌 ‘할 일을 마친 사람[了事人]’이 본래의 고요함[寂]과 본래의 앎[知]을 떠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계(曹溪) 스님이 말하기를, “스스로 깨닫고 수행함은 따지는[諍] 데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미혹한 사람이다(『육조단경』 「정혜품」)”라고 하였다.(p188~191)

타기다

  • ‘닮다’의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