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석(法席)
- 대중이 둘러앉아서 설법, 독경, 강경, 법화(法話) 따위를 행하는 자리.
단지불회 시즉견성(但知不會 是卽見性)
- '다만[但] 알지 못할[不會] 줄 알면[知] 곧[是卽] 성품을 본[見性] 것이니라'
[참고]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스님)
問 作何方便 一念廻機 便悟自性
答 只汝自心 更作什麼方便 若作方便 更求解會 比如有人 不見自眼 以謂無眼 更欲求見 旣是自眼 如何更見 若知不失 卽爲見眼 更無求見之心 豈有不見之想 自己靈知 亦復如是 旣是自心 何更求會 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문) 어떤 방편을 지어야 한 생각 기틀을 돌이켜서 곧 자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답) 다만 너의 스스로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지으려 하는고. 만일 방편을 지어서 다시 알기를 구한다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서는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의 눈인데 무엇을 다시 보리오. 만일 잃지 않은 줄 알면 곧 눈을 본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도 없거니 어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으리오.
자기의 영지(靈知)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일 알려고 한다면 곧 알지 못할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할 줄 알면 곧 성품을 본[見性] 것이니라.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
- 고려의 스님.
[참고]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 고려의 스님.
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니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의종(毅宗) 19년(1165) 8세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에 속하는 종휘(宗暉)에게 출가하였으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오직 도덕이 높은 스님이면 곧 찾아가서 배웠다. 명종 12년(1182) 25살 때인 임인(壬寅)에 대선고시(大選考試)에 합격하였다.그 후 얼마되지 않아 전남 창평군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주석하던 중 하루는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켜서 육근(六根)이 비록 견문각지(見聞覺知)하나 삼라만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진여(眞如)의 성(性)은 항상 자재(自在)하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스스로 얻은 바가 있었다.
명종 15년(1185 乙巳)에는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람하다 이통현(李通玄) 장자(長者)가 지은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을 보다가 거듭 신심(信心)을 일으켜 화엄경의 오묘한 이치를 찾아내고 난해한 뜻을 드러내어 제가(諸家)의 설(說)과 비교하여 더욱 정통하였다.1190년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정혜쌍수(定慧雙修)할 것을 권하였다. 신종(神宗) 1년(1198 戊午) 몇 사람의 도반과 함께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은거하였다.
스님께서 일찍이 말씀하되,
“내가 보문사(普門寺)에서 지낸 이후 10여 년이 경과하였다. 비록 뜻을 얻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허송한 적이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이 사라지지 아니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어 원수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아서 항상 꺼림직 하였다.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주석하면서 정진하는 여가에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 1089~1163)의 어록(語錄)을 보다가,
‘…… 선(禪)은 고요한 곳[靜處]에도 있지 않고 또한 분요한 곳[鬧處]에도 있지 아니하며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 일상생활에서 인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에도 있지 않습니다. 비록 이와같으나 제일(第一)에 정처(靜處)와 요처(閙處)와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와 사량분별처(思量分別處)를 버리고서도 아니됩니다. 참(參)하여 홀연히 눈을 뜨면 바야흐로 모두 다 자가옥리사(自家屋裏事 자기 집안의 일)입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뜻이 딱 들어맞아 마음에 깨달으니, 자연히 가슴이 후련하며, 원수와 멀리한 것 같아서 곧 마음이 편안하였다”고 하였다.1200년(신종 3, 庚申)에 조계산 길상사(吉祥寺), 곧 지금의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11년간 대중을 지도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그리고 대중에게 송지(誦持)하기를 권함에는 항상 『금강경(金剛經)』으로써 법을 삼도록 하고, 교의(敎義)를 연설함에는 『육조단경』을 강설하며, 통현장자(通玄長者)의 『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으로써 주장을 펴고, 『대혜어록(大慧語錄)』으로써 함께 우익(羽翼)을 삼았다.수행에는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과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 경절문(徑截門)을 세워 수행자들을 지도하였다.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역설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상수(定慧雙修)를 권하고 간화선(看話禪)으로 증오(證悟)할 것을 주창하였다.
1210년(희종 6년) 3월 27일 53세의 나이로 입적(入寂). 희종은 그에게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그의 묘탑에도 감로(甘露)라는 이름을 내렸다.
3월 27일 아침, 스님께서 세수와 양치질을 한 다음, “이 눈은 조사(祖師)의 눈이 아니고, 이 코도 조사의 코가 아니며, 이 입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입이 아니고, 이 혀도 어머니가 낳아준 혀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법고(法鼓)를 쳐서 대중을 모이게 하여 설법을 하고 문답을 하신 다음, 마지막으로 어떤 스님이 묻기를 “옛날 유마거사가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시질(示疾)한 것과, 오늘 조계산에서 목우자(牧牛子)가 작병(作病)한 것이 같은가? 다른가?”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너희들은 같은지 다른지를 배워라” 하고, 주장자(柱杖子)를 잡고 몇 번 내리치고 말하되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느니라” 하고, 주장자를 잡고 법상에 걸터앉아 고요히 입적하였다.저서 :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 수심결(修心訣) · 진심직설(眞心直說) ·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 염불요문(念佛要門) 등.
수심결(修心訣)
- 고려 때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의 저술. 1권.
- 삼계의 윤회를 벗어나 부처가 되기 위하여 마음 닦는, 수심(修心)의 요결(要訣)을 밝히는 내용으로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은 아홉 번의 문답으로 전개되는데, 불성(佛性) · 돈오점수(頓悟漸修) · 공적영지(空寂靈知) · 정혜등지(定慧等持) · 정혜체용(定慧體用) · 목우행(牧牛行) · 이즉돈오 사비돈제(理卽頓悟 事非頓除) 등에 관한 내용이 있고 결론으로 간절히 금생에 이 몸을 제도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 『보조국사수심결(普照國師修心訣)』 · 『보조선사수심결(普照禪師修心訣)』 이라고도 한다. 저술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 주석 시기(1198~1200) 전후로 추정한다.
척사현정(斥邪顯正)
- 삿된 것을 거부하여 물리쳐, 불법(佛法)의 진리를 올바르게 나타내 보임.
운문방(雲門棒)
-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의 내용을 말함.
[참고 ①]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拈頌說話) 1』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제2칙 ‘주행(周行)’ p27. p40~41.
世尊初生下時 周行七步 目顧四方 一手指天 一手指地云 天上天下唯我獨尊[雲門偃拈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
세존께서 처음 탄생하실 때,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시며 한 손으론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론 땅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셨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서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운문 문언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때려 잡아서 주린 개나 주어 씹혔으면 세상을 태평케 하였겠다!]
圓通璣 上堂擧此話云 可謂欺視三界 傍若無人 最好是雲門 出來道 至天下大平 然 此二古聖 於建化門中 善則善矣 美則美矣 若於本分事中 檢點將來 猶欠一着在 敢問大衆 作麽生是本分事 良久云 鴛鴦繡出從敎看 莫把金針度與人
원통기(圓通璣)가 상당하여 이야기를 들어 말하였다. “가히 삼계(三界)를 속이는 방약무인(傍若無人)한 짓이구나. 가장 좋은 것은 운문(雲門)이 나와서 말하기를 ‘천하의 태평이나 도모했을 것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성인이 건화문(建化門)에서 볼 때엔 좋기는 좋고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만약 본분(本分)에서 장래를 점검해 보면 그래도 하나가 모자란다. 삼가 대중에게 묻노니, 무엇으로 본분의 일이라 하는가?”
그리고는 양구했다가 말하였다. “원앙새 수(繡)놓은 것은 보여주거니와 금침(金針)은 그대에게 건네줄 수가 없다”
[참고 ②] 운문긱구자(雲門喫狗子) ; 석가여래께서 출생하면서 바로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가장 높다(天上天下唯我獨尊)」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여러 조사 스님들이 해석도 하고 칭송도 한 바가 많지마는,
운문 문언선사는 말하기를 『내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한 몽둥이로 때려 잡아서 주린 개나 주어 씹혔으면 세상을 태평케 하였겠다! (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여러 선지식들은 『아! 운문이야말로 참으로 「유아독존」의 뜻을 잘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답다』하고 모두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