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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유생로병사(人有生老病死)

  • 생로병사(生老病死).

생로병사(生老病死)

  • 중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주요한 네 가지 현상. 출생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생(生), 노쇠하는 현상을 노(老), 병든 현상을 병(病),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현상을 사(死)라 한다.
  •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일반적 형식으로서 사상(四相)이라고도 하고, 이것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고(四苦)라고도 한다. 생로병사가 사라진 경계가 무위법(無爲法)인 열반(涅槃)이다.
  •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34~135. (가로판 p139~141)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시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시며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시니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이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살라 버린다」 하시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 하시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 하시니,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할지어다.

註解(주해) 身有生老病死하고 界有成住壞空하고 心有生住異滅하니 此無常苦火가 四面俱焚者也라 【謹白參玄人하노니 光陰을 莫虛度하라

몸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에는 이루어지고[成] 지속되고[住] 파괴되고[壞] 없어져[空] 버리는 것이 있으며, 마음에는 일어나고[生] 머물고[住] 변해 가고[異] 사라져[滅] 버리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덧없는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치를 참구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부디 광음을 아껴 헛되이 보내지 말라.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成],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住], 쇠퇴하여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壞], 모든 것이 괴멸되어 허공만 있는 과정(상태)[空]이 반드시 있게 된다.
  • 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측이목이청현음(側耳目而聽玄音)

  • '눈과 귀를 기울여 현미(玄微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미묘함)한 소리를 들으며'

[참고]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

聞法之次 如履薄氷 必須側耳目而聽玄音 肅情塵而賞幽致 下堂後 默坐觀之 如有所疑 博問先覺 夕惕朝詢 不濫絲髮

법문을 들을 때에는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여, 반드시 눈과 귀를 기울여 현미(玄微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미묘함)한 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에 번뇌를 맑히고 그윽한 이치를 완상(玩賞)하다가, 법당에서 내려온 뒤에는 묵묵히 앉아 관하되, 만일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먼저 깨우친 이에게 널리 물으며, 저녁에 근념(勤念)하고 아침에 물어서 실오라기 털끝만큼도 넘기지 말지니라.

평상화(平常話)

  • ① 평범한 말. 평상시의 말.
  • ② 평상시(平常時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이야기[話]. 일상생활 이야기. 일상생활.

[참고 ❶] 송담스님(No.058)—1977년 동지차례(77년 12월 22일)(정사년 11.12 음)

참선(參禪)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평상화(平常話), 일상 생활—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하고, 소지하고, 걸어 다니고—하는 그 생활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참선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역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일을 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생각으로 성내고 웃고 울고 하는 그 일상, 평상시의 생활을 조금도 여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도 그렇고 또한 참선도 그렇습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 일체 행동 동작을 떠나서 깨달음이 있다면은 그것을 떠나서 찾아야 되겠지마는, 중생의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뚱이와 생각, 그놈을 일찰나(一刹那)도 떠나지 아니하고 깨달음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10분2초~11분29초)

[참고 ❷] 송담스님(No.332)—1987년 6월 첫째일요법회.(4분 59초)

[평상화]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군금욕심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처음~5분6초)

제일구(第一句)

  • ① ‘처음 한마디 말’이니 불교의 핵심도리를 드러내는 첫번째 말.
  • ②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생각으로 개념 지을 수 없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以心傳心) 진리를 가리키는 말.

[참고 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207. (가로판 p212)

[ 三句 ] 第一句는 喪身失命이요 第二句는 未開口錯이요 第三句는 糞箕掃箒라.

삼구 : 첫째 구는 몸 죽고 목숨 잃는 것이요, 둘째 구는 입을 열기 전에 그르쳤고, 세째 구는 똥삼태기와 비이니라

[참고 ②] 『임제록(臨濟錄)』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

산승의 견처(見處)는 불조(佛祖)와 다르지 않다. 제1구에 깨달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제2구에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고, 제3구에 깨달으면은 제 몸도 구제하지를 못한다.

[참고 ③] 『西山大師의 禪家龜鑑硏究』 (신 법인著, 김영사) p360~361

第一句 喪身失命 第二句 未開口錯 第三句 糞箕掃箒.
즉 第一句는 身命을 喪失하고, 第二句는 입도 열기 전에 틀리며, 第三句는 便을 치우는(糞掃) 箕掃라는 것이다.

앞에서 본 바에 의하면 臨濟는 ‘如何是第一句오’라는 學僧의 물음에,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이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그의 어록에, ‘若第一句中得 與祖佛爲師 若第二句中得 與人天爲師 若第三句中得 自救不了’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第一句중에서 얻게 된다면 祖師와 佛陀와 더불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선가귀감)는 第一句에 ‘喪身失命’이라고 하여 있다.

第二句는 ‘未開口錯’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風穴昭禪師의 說이다. ‘人天眼目‘에는 ‘如何是第二句’下에 師云이라 하여 臨濟의 第二句語가 있고, 다음에 風穴云의 ‘未開口前錯’(『인천안목』 권1 三句)이 있다.(問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穴云, 未開口前錯)

第三句下의 ‘糞箕掃箒’는 雲峯悅禪師의 說이다. 이 역시 ‘如何是第三句’ 밑에 師云이라 하여 臨濟의 第三句語가 있고, 그 다음에 風穴과 道吾의 言及이 있고 이어서 ‘峯云 糞箕掃箒’(『인천안목』 권1 三句)라고 있다.(問如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穴云, 明破則不堪. 吾云, 頭上一堆塵. 脚下三尺土. 印云, 西天此土. 峯云, 糞箕掃箒)

말후구(末後句)

  • ① 말후(末後)는 구경(究竟), 필경(畢竟), 구극(究極), 지극(至極)의 뜻. 구(句)는 언구(言句), 어구(語句), 문구(文句)란 뜻. 크게 깨달아 구경에 이르러서 하는 말. 지극한 글귀. 말후일구(末後一句).
  • ② 문장의 맨 끝의 말.
  • ③ 임종의 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421칙. 「백수(栢樹)」 『선문염송 · 염송설화 4』 (혜심·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51~252.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庭前栢樹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께서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하였다. "나는 경계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노라"

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도장원(都壯元)

  • 장원(壯元).
  • ① 예전에, 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서 일등으로 급제하는 일이나 그 사람을 이르던 말.
  • ② 글을 제일 잘 지어 성적이 첫째임. 또는 그런 사람.

달다

  •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의 물음에 대한 전강 스님의 답. "달다"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20~22.

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

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에 대오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