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다
-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의 물음에 대한 전강 스님의 답.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20~22.
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하고 물었다.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할지어다.
도장원(都壯元)
- 장원(壯元).
- ① 예전에, 과거(科擧)의 갑과(甲科)에서 일등으로 급제하는 일이나 그 사람을 이르던 말.
- ② 글을 제일 잘 지어 성적이 첫째임. 또는 그런 사람.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시설(施說)한 선(禪)의 관문. 천칠백 칙 공안을 말함.
-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부중선사도덕(不重先師道德) 불위아설파(不爲我說破)
- ‘부중선사도덕(不重先師道德) 지중선사불위아설파(只重先師不爲我說破)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은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
[참고 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刊) p171. (가로판 p179)
本分宗師의 全提此句는 如木人唱拍하며 紅爐點雪이요 亦如石火電光이니 學者實不可擬議也니라 故로 古人이 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이요 只重先師不爲我說破라 하시니라
본분 종사가 이 구를 온전히 들어 보이심이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 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니 배우는 자가 참으로 어떻다고 헤아리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씀하기를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은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시니라.
[참고 ②]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白雲景閑和尙 抄錄 | 원조각성 번역 · 주해 | 현음사) p533~534.
洞山良价禪師가 問雲嵓和尙호대 百年後에 忽有人이 問호대 還邈得師眞不아 하면 如何祗對닛고 嵓이 良久云只這是니라 師가 佇思어늘 嵓이 云承當者个事인댄 大須審細니라
동산 양개 선사가 운암 화상에게 묻기를 “백년 후에 문득 어떤 사람이 묻기를 ‘운암 스님의 모습을 그려서 얻을 수 있느냐?’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됩니까?”
운암 화상이 양구하고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이것이니라” 양개 화상이 머뭇거려서 생각하거늘 운암 화상이 말씀하시기를 “이런 일을 알아차릴진댄 크게 모름지기 자세하게 알아야 될 것이니라”師가 猶涉疑러니 後에 因過水覩影하고 大悟前旨하야 乃有偈曰 切忌從他覓이니 迢迢與我踈라 我今獨自往에 處處得逢渠라 渠今正是我요 我今不是渠라 應須恁麽會하야사 方得契如如니라
양개 화상이 오히려 의심이 있었더니 그 후에 물을 건너다가 그림자를 보고 앞에서 운암 스님이 말씀하신 그 뜻을 크게 깨달아서 이에 게송을 하셨다.
간절히 딴데서 찾지 말 것이니 그러면 멀고 멀어서 나와 소원하네. 내가 지금 혼자 스스로 감에 곳곳마다 저를 만나게 된다. 저것이 지금 바로 나이고 나는 지금 바로 저것 아니네. 모름지기 이렇게 알아야만 비로소 여여한 도리에 계합하리라.
[참고 ③]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 · 拈頌說話)』 제17권 (혜심 · 각운 지음 | 김월운 옮김 ㅣ 동국역경원) 제682칙. ‘지시(指示)‘ p222~223.
洞山이 爲雲嵓諱旦하야 設齋陞座어늘 時有僧이 問하되 和尙이 在雲嵓處하야 得何指示닛고한대 師云하되 雖在彼中이나 不蒙指示로다하니 進云하되 旣不蒙指示인댄 何故爲佗設齋닛고한대 師云하되 爭敢違背佗리요하다 進云하되 和尙이 旣發足南泉이어늘 何故로 爲雲嵓設齋닛고한대 師云하되 我不重先師道德이며 亦不爲佛法이요 只重佗當時에 不爲我說破로다
동산이 운암의 기일(忌日)에 공양을 마련하고 법상(法床)에 올랐는데 어떤 스님이 나와서 말하였다.
“화상께서 운암의 처소에 계실 때 어떤 지시를 받았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비록 거기에 있기는 했었지만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노라”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다면 어째서 그를 위해 재를 마련하셨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그를 배반할 수는 없지 않는가?”
다시 물었다. “ 화상은 이미 남전(南泉)에게서 발심했는데 어째서 운암의 재를 차렸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나는 선사(先師)의 도덕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며,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때 나에게 설파(說破)해 주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길 뿐이니라”
[참고 ④] 『서장(書狀)』 ‘답고산체장로(答鼓山逮長老 : 고산체 장로에게 보낸 답장)‘에서.
若使老漢 初爲渠 拖泥帶水 說老婆禪 眼開後 定罵我無疑 所以 古人云 我不重先師道德 只重先師不爲我說破 若爲我說破 豈有今日 便是遮箇道理也
만약 나로 하여금 처음부터 그를 위해 나 자신을 더럽혀가며(흙탕물을 뒤집어 쓰며) 노파선을 설하였다면 그가 안목이 열린 후에는 틀림없이 나를 비난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인(洞山良价)이 ‘나는 선사(先師 : 雲嵓)의 도덕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선사가 나에게 설파하지 않았던 것을 중히 여긴다’라 하였고, 또한 (香嚴이 潙山의 은덕을 기리며) ‘만약 나에게 설파해 주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곧 이것이 이러한 도리(道理)입니다.趙州云 若敎老僧 隨伊根機接人 自有三乘十二分敎 接他了也 老僧這裏 只以本分事接人 若接不得 自是學者根性遲鈍 不干老僧事 思之思之
조주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내가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사람들을 접화(接化)한다면, 응당 삼승십이분교를 가지고 사람들을 접화할 것이지만, 나는 이곳에서 다만 본분사(本分事)로써 사람들을 접화할 뿐이다. 접화되지 않는다면 원래 학자의 근성이 굼뜨고 둔한 것이어서 나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하셨으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셔야 합니다.
[참고 ⑤] 『전등록(傳燈錄)』 제11권. (김월운 옮김 ㅣ 동국역경원) p718~720.
鄧州香嚴智閑禪師靑州人也 厭俗辭親觀方慕道 依潙山禪會 祐和尙知其法器 欲激發智光 一日謂之曰 吾不問汝平生學解及經卷冊子上記得者 汝未出胞胎未辨東西時 本分事試道一句來 吾要記汝
등주 향엄지한 선사는 청주(靑州) 사람이다. 속세를 싫어하여 부모를 하직하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도를 흠모하다가 위산(潙山)의 선회(禪會)에 의지했다. 영우(靈祐) 화상은 그가 법을 이을 만한 그릇임을 알고 지혜의 광명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의 평생 배운 견해와 경전이나 책에서 기억해 가진 것을 묻지 않겠다. 그대가 아직 태(胎)에서 아직 나오지 않아서 동쪽과 서쪽을 분간하지 못할 때의 본분사(本分事)에 대해서 시험 삼아 한마디[一句] 말해 보라. 내가 그대에게 수기하겠다”師懵然無對 沈吟久之 進數語陳其所解 祐皆不許 師曰 却請和尙爲說 祐曰 吾說得是吾之見解 於汝眼目何有益乎 師遂歸堂 遍檢所集諸方語句無一言可將酬對 乃自歡曰 畵餠不可充飢 於是盡焚之曰 此生不學佛法也 且作箇長行粥飯僧兔役心神
대사가 어리둥절하면서 대답을 못하다가 오래 침음(沈吟)한 끝에 몇 마디의 견해를 말했으나, 영우가 모두 허락하지 않으니 대사가 말했다. “화상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영우가 말했다. “내가 말하면 나의 견해일 뿐이니, 그대의 안목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사가 결국 방으로 돌아가서 수집해 놓은 제방(諸方)의 어구(語句)들을 뒤져 보았으나, 한마디도 대꾸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에 대사는 스스로 탄식하였다. “그림의 떡으로는 굶주림을 채울 수 없구나”
그리고는 모두 태워 버리면서 말했다. “금생에 불법을 배우지 못할 바에는 먼 길을 떠나 죽이나 밥을 먹어치우는 중이 되어서 심신(心神)의 괴로움이나 면하리라”遂泣辭潙山而去 抵南陽覩忠國師遺迹遂憩止焉 一日因山中芟除草木 以瓦礫擊竹作聲 俄失笑間廓然惺悟 遽歸沐浴焚香遙禮潙山 賛云 和尙大悲恩逾父母 當時若爲我說却 何有今日事也 仍述一偈云
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 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處處無踪迹 聲色外威儀 諸方達道者 咸言上上機그리고는 울면서 위산을 하직하고 남양(南陽)에 이르러 혜충국사(慧忠國師)의 옛터를 구경하다가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서 잡초를 베다가 기와를 던진 것이 대나무에 부딪쳐 소리가 나는 찰나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확연히 깨달았다. 급히 돌아와서 목욕하고 향을 피우면서 멀리 위산을 향해 절을 하며 찬탄했다. “화상의 대비하신 은혜는 부모의 은혜보다 높습니다. 그 당시에 만일 저에게 설명하셨다면, 어찌 오늘의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게송 하나를 지었다.
한 번 치는 소리에 아는 바를 잊으니 다시는 닦고 다스리지 않게 되었네.
덩실덩실 옛길을 넘나드니 초조해 하는 근기에 떨어지지 않네.
곳곳마다 자취를 남기지 않고 빛과 소리 밖의 위의(威儀)로다
제방(諸方)의 도를 통달한 자들이 모두 상상기(上上機)라 말하네.
[참고 ⑥]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80-181) (가로판 p171~172)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참고 ⑦]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에서.
학자(學者)에게, 참선(參禪)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공안을 설파해 주면 이 세상에 제일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힘으로 타파(打破)를 해야지, 이론을 통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타파를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지, 이 공안을 갖다가 요리조리 힌트를 줘가지고 알것께 맨든 것은 이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이 되아서 그것은 그럴싸하니 답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깨달을 분(分)을 없게 맨들아 주는 것이 되는 것이여.참선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병을 앓고 신음을 하던 사람이 겨우 인자 그 병을, 병근(病根)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공안을 갖다가 설파를 해주면 겨우 일어설라고 몸부림친 놈을 여지없이 몽둥이로 쳐서 꺼구러뜨려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가지고 일어설라 말라 하는데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리니 인자는 그 사람은 일어나기가 틀린 것입니다. 공안을 설파해 준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57분59초~59분25초)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증(證)
- 증득(證得). 증오(證悟).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하는 것 또는 깨치는 것을 말한다.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를 증과(證果)라고 하며, 최종의 증과는 성불(成佛, 부처가 됨)이다.
종일수타보(終日數他寶) 자무반전푼(自無半錢分)
- ‘온종일 남의 보배만 세면서 자기에게는 한 푼도 없다’
[참고]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강설』 (실차난타實叉難陀 한역 | 무비 스님 강설 | 담앤북스) ‘10.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p220~230 참고.
爾時 文殊師利菩薩 問法首菩薩言 佛子 如佛所說 若有衆生 受持正法 悉能除斷一切煩惱 何故 復有受持正法 而不斷者 隨貪瞋癡 隨慢 隨覆 隨忿 隨恨 隨嫉 隨慳 隨誑 隨諂 勢力所轉 無有離心 能受持法 何故 復於心行之內 起諸煩惱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법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만약 어떤 중생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면 다 능히 일체 번뇌를 끊어 제거한다 하셨거늘 무슨 까닭으로 다시 바른 법을 받아 지니고도 끊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고, 아만을 따르고, 감춤을 따르고, 분심(忿心)을 따르고, 한(恨)을 따르고, 질투를 따르고, 인색함을 따르고, 속임을 따르고, 아첨을 따르는 세력의 구르는 바가 되어 떠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능히 바른 법을 받아 지닐진댄 무슨 까닭으로 다시 마음의 움직임 안에서 모든 번뇌를 일으킵니까?”時 法首菩薩 以頌答曰 佛子善諦聽 所問如實義 非但以多聞 能入如來法
그때에 법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불자여, 잘 들으소서. 물은 것이 사실과 같으니 다만 많이 듣는 것으로는 능히 여래의 법에 들어가지 못하리라.如人水所漂 懼溺而渴死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어떤 사람이 물에 떠내려가면서 빠질까 두려워 목말라 죽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如人設美饍 自餓而不食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어떤 사람이 좋은 음식을 늘어놓고도 스스로 주리면서 먹지 않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如人善方藥 自疾不能救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어떤 사람이 약방문을 잘 알면서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如人數他寶 自無半錢分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어떤 사람이 남의 보물만 세면서 자기에게는 한 푼도 없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如有生王宮 而受餒與寒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마치 왕궁에 태어난 사람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如聾奏音樂 悅彼不自聞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마치 귀머거리가 음악을 연주하되 남은 기쁘게 하나 자신은 못 듣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如盲繢衆像 示彼不自見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마치 눈먼 이가 온갖 형상을 수놓되 남에게는 보이면서 자신은 못 보듯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譬如海船師 而於海中死 於法不修行 多聞亦如是
비유하건대 바다의 뱃사공이 바다에서 죽는 것과 같이, 법에 수행하지 아니하면 많이 듣는 것도 또한 이와 같도다.如在四衢道 廣說衆好事 內自無實德 不行亦如是
마치 네거리 길에서 온갖 좋은 일을 널리 말하되 자신에게는 실다운 덕이 없듯이, 행하지 아니하면 또한 이와 같도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본래 한 물건도 없다’
-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오는 혜능선사의 게(偈)의 한 구절로 범부와 성인, 깨달음과 미혹, 생사와 열반 등 모든 대립된 차별상이 없는 본래의 모습을 가리킨다.
- 중국 선종의 5조 홍인(弘忍) 대사가 법을 부촉(咐囑)할 때가 된 것을 알고 대중에게 각자 게송을 지으라고 하자, 대중의 상좌(上座)인 신수(神秀)가 게송을 지어 복도 벽에다 써 놓았다.
- 몸은 보리수(菩提樹)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 끼지 않도록 하라(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 혜능(慧能)은 동자(童子)가 이 신수의 게송을 외는 소리를 듣고 이 게송은 아직 본성을 보지 못한 것임을 알고, 동자를 데리고 게송 있는 곳으로 가서 별가 스님에게 부탁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 하나를 쓰게 부탁했다.
- 보리에 본래 나무 없고 명경(明鏡) 또한 대(臺)가 아니네.(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있으랴.(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 응량기(應量器)란 법(法)에 응(量)하는 또는 1명의 식량(食量)에 마땅한 그릇[器]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고,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